Image copyright Lorena Quaranta
스페인 알마소라 마을에 조기가 게양됐다. 주민들은 가정폭력으로 숨진 카리나(35)의 죽음을 기리며 3일동안 애도를 가졌다.
평소 같으면 그를 추모하는 물결이 거리를 메웠을 것이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봉쇄 조치가 내려지면서 발렌시아와 가까운 이 마을 주민들도 외출을 할 수 없었다.
종소리가 울렸다. 시청에서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퍼져 나왔다. 주민들은 창문이나 발코니로 나와 애도를 표했다.
카리나는 집 안에서 두 아이가 보는 앞에서 남편에게 살해됐다. 남편 호세는 마을 방범대원에게 자수하고 범행을 자백했다.
국가 봉쇄가 가정 폭력 위기에 놓인 여성들을 더 큰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가해자와 한 집에 지속적으로 머무르면서 폭력 피해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외부에 도움을 청하기는 더 어려워진 것이다. 아이들도 학교에 가지 못해 폭력 트라우마에 더 많이 노출됐다.
카리나는 올해 스페인에서 파트너에게 살해당한 17번째 여성이다. 그리고 코로나 19 확산으로 이동 제한 조치가 내려진 뒤 첫 희생자였다.
집에서는 가해자가 밖에서는 바이러스가 두렵다
유럽이 정체 상태에 빠진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공식 통계에서 가정폭력 수치를 찾는 건 아직 이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폭력 가정의 위기 분위기를 일찌감치 감지했다. 피해자들은 집 안에서는 가정폭력 가해자를, 밖에서는 바이러스를 두려워하고 있다.
스트레스는 가해자를 더 불안하게 만든다. 격리 조치로 사생활 영역이 확대되면서 이들은 처벌받지 않을 거라는 잘못된 기대마저 품는다.
스페인의 카나리섬평등연구소 키카 푸메로 트레이스 대표는 국가 비상사태가 발령된 3월 14일을 회상했다.
"그 순간부터 알았어요. 코로나19 확산 방지에 도움이 되는 조치가 폭력 가정에 있는 여성과 아이들에게는 끔찍하리라는 걸요." 트레이스 대표는 BBC에 이렇게 말했다.
We know for sure women are suffering more abuse during this quarantine than in normal times
"우리는 여성들이 코로나19 격리 시기에 평소보다 더 많은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키카 푸메로, 카나리섬평등연구소
그는 홍수가 나거나 공휴일이 지속되는 시기에 가정 폭력이 급증하는 것을 봐왔다. 여성들이 파트너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도록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도 감염병의 최전선에 있다. 100명 이상의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다 목숨을 잃었다.
로레나 콰란타(27)는 그러나 의사 자격을 취득하기 얼마 전인 3월 30일 사망했다. 코로나19의 피해자는 아니었다. 남자친구 안토니오는 경찰에 그가 콰란타를 죽였다고 말했다.
콰란타의 관이 고향 시칠리아 파바라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발코니마다 흰 천을 걸었다. 안나 알바 시장은 이를 두고 "콰란타의 순수한 정신과 남은 생애 동안 입고 싶어했던 의사 가운의 색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봉쇄와 가정폭력의 상관관계
당초 프랑스는 국가 전화상담센터로 걸려오는 전화가 확연히 줄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일주일 만에 정부는 경찰이 집계한 가정폭력 건수가 전국적으로 3분의 1 더 늘었다고 밝혔다. 수도 파리의 증가 비율은 더 컸다.
청각장애인을 위해 마련한 문자상담 서비스가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에 동원됐다. 하루 평균 170건이 접수된다. 건수가 줄어든 지역은 쇼핑센터가 영업을 재개했거나, 위기에 놓인 가해자 지원 서비스가 있는 곳이다.
스페인에서는 성별 때문에 폭력에 노출된 여성 지원 서비스가 필수 사항으로 지정돼 있다. 이들이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것도 정부의 보증 덕이다.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두 주간, 016전화상담센터로 걸려온 전화량은 이전달 같은 기간에 비해 18% 늘었다.
프랑스는 문자로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기간 이메일 문의가 286% 이상 증가했고, 왓츠앱으로 제공하는 정신지원메시지서비스가 9일만에 168건의 문의를 받은 것이다.
여성을 살리는 마스크
스페인의 카나리섬평등연구소는 마스칼라19(마스크19) 캠페인을 시작했다. 가정폭력은 격리 기간에 집을 나갈 수 있는 합당한 이유임을 강조하는 운동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은 극히 제한적이다. 약국은 그 중 하나다.
이 캠페인을 기획한 키카 푸메로 대표는 "여성이 집에서 폭력이나 성폭력을 경험했을 때, 가장 가까운 약국으로 가면 된다. 마스크19를 요청하면 그 마스크는 여성의 생명을 보호한다"고 설명했다.
약국 직원은 여성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받고 응급 센터에 알린다. 피해 여성은 집에 가거나, 경찰 혹은 지원활동가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
스페인 테네리페의 한 여성은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된 뒤 파트너 집에 2주동안 갇혀 있었다. 그는 약국에 가서 파트너가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마스크19'라는 암호를 말한 뒤에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란 카나리아에서 남편에게 살해된 78세 여성은 스페인의 국가 봉쇄 이래 나온 두 번째 가정폭력 희생자였다.
정부에서 성폭력 대응을 담당하는 비키 로셀은 "고령 여성들은 가정폭력을 알리기 전에 평균 15년동안 그것을 견딘다"고 설명했다. "스스로 고발하고, 남을 위해 고발하세요.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마스크19 캠페인은 스페인 전역으로 번졌다.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노르웨이, 아르헨티나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봉쇄는 왜 여성을 더 철저히 가두는가
마드리드에서 가정폭력 반대 캠페인을 벌이는 아스파시아 재단의 버지니아 길 대표는 봉쇄 상황에서 보고되는 가정폭력 수는 "빙산의 일각"이라 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여성들은 여러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가해자에게 신고한 것이 발각될까, 집밖에 나갔다가 코로나19에 감염될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또 지역에 어떤 지원 서비스가 운영되는지 잘 모른다.
길 대표는 또 평소 같으면 집에서 바로 체포될 가해자들이 코로나19 상황에서는 체포되지 않거나 법정까지 회부되지 않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은 코로나19 기간 가정폭력 신고가 예년에 비해 적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첫 확진자가 나온 1월 20일부터 4월 1일까지 작년 동기간 대비 가정폭력 신고가 4만5065건으로 지난해 4만7378건에 비해 4.9% 줄었다.
하지만 한국여성의전화 최선혜 여성인권상담소장은 국가기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고 해서 가정폭력이 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한국여성의전화 2~3월 총 상담건수는 작년 동기간과 비슷하지만, 이 가운데 가정폭력 상담이 차지하는 비율은 1월 26%에서 2~3월 40%대로 크게 늘었다.
최 소장은 BBC 코리아에 "코로나19로 가해자와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폭력도 이에 비례해 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가정폭력 신고율은 지난해 처음 2%대가 됐을 정도로 신고율 자체가 낮다. 그 건수가 늘고 주는 것으로 실제 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유럽은 국가 차원에서 가정 폭력에 대응하겠다거나 신고하라는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내고 있는 데 비해 한국은 코로나19로 외출을 제한하라는 메시지만 보내고 있죠. 가정 폭력을 당하고 있다면 어떤 상담과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더 적극적으로 알려야 합니다."
각기 다른 상황들
러시아 모스크바 서쪽으로 113km 떨어진 아파트에 사는 마리아(가명)는 집을 떠나느냐 머무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그는 코로나19 이전만 해도 남편이 폭력을 행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난달 26일, 남편은 갑자기 화를 냈고 폭력적인 상황은 무려 18시간동안 계속됐다.
"처음에는 언어폭력이었어요. 그러고 나서 그는 물건들을 부수기 시작했고, 아이와 저한테 던졌죠." 그는 BBC 러시아 서비스에 이렇게 말했다. "그는 어항, 냉장고 할 것 없이 때려 부쉈어요. 아이들은 벌벌 떨었습니다."
그는 남편의 폭력에 기름을 부은 건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한 주간 휴업 발표라고 했다. 수입이 사라진 것이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남편이 맥주를 사러 집을 나서자 마리아는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경찰은 남편을 쫓아낼 수 없다고 했어요. 이 집이 남편 소유라서요." 아이들과 함께 갈 보호소를 찾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덴마크에서는 정부가 격리 명령을 발표한 지 일주일만에 긴급 쉼터를 찾는 전화량이 두 배로 늘었다. 정부는 4개월 동안 쉼터에 방을 55개 추가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봉쇄조치를 완화, 여성들이 도움을 구할 기회를 넓히기도 했다.
덴마크 여성단체 다너(Danner)가 운영하는 신규 위기센터 수잔 라 마주 대표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모두를 위한 공간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집에 머무르는 게 항상 안전하지는 않다
유럽평의회 성폭력 전문가그룹 대표 마르셀린 나우디에 따르면 코로나19 감염 공포는 도움을 청하기 어려운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일부 피해 여성들은 전염을 우려하며 의학적 치료를 거부한다. 이는 피해자들이 갈 곳이 그만큼 줄어듦을 뜻한다.
"일부 지역 가정폭력 쉼터는 이미 입소를 중단했습니다. 감염 위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죠."
그는 또 여성들이 경제적 문제 때문에 가해자에 의존하고, 집을 떠나기 어려워하고 있다고도 했다.
감염병 시기, 각국은 집에서 머무르는 것만이 생명을 지키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매일매일이 불확실한 가운데 가정폭력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어떤 이들에게 그 주문은 더욱 절망적일 수 있다.
※ 가정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대한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여성긴급전화 ☎1366, 청소년 피해자의 상담은 청소년 전화 ☎1388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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